어렸을적부터 나는 책벌레였다. 초등학교때 (입학할때는 국민학교였는데 졸업은 초등학교에서 했음 ㅋㅋ) 일년에 한번씩은 반드시 누군가 들어와서 열댓권 혹은 그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학전집을 홍보하곤 했었다. 나는 그날 나누어 받은 종이 쪼가리에 구입의사를 밝힌 아빠의 사인을 채워 다음날 학교에 가져가는 몇 안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IMF전후로 하여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계속 그랬다. 새 책을 가지고 싶다는 나의 간접적인 조름을 받으면 아빠는 항상 사다놓고 읽지 않은채 방치할까봐 걱정을 하셨지만, 나는 항상 책에 굶주렸었다. 조부모님과 결혼전의 삼촌, 언니 중 누가 주인일지 모를 책들 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어느날부터는 백과사전까지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으니까.
어떻하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는 책을 굉장히 빨리 읽었다. 보통 수준의 보통 두께의 책이라면 한시간도 채 안되 한권을 끝내곤 했다. 물론 나중에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속독 능력으로 많은 혜택을 보긴 했지만, 책 읽기에 있어 빨리 혹은 느리게 읽는 것 중 무엇이 더 좋은지는 사실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책의 자잘한 묘사나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곱씹지 못한다. 이건 내가 상당히 많은 종류의 책을 내가 그 깊이대로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미리 읽어버린 이유도 한 몫 할거라 생각한다. 더 큰 이유는 아마 내가 책을 읽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 빠르게 들어오는 단어들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나는 책을 '읽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보게' 된다. 그래서 마치 달리는 기차에 쉼없이 석탄을 때듯 다음 영상을 위한 단어들을 섭취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작가의 문체 (혹은 번역가의 번역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옛날 번역으로 출판된 외국작품들을 읽으며 이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건 내가 그 장면을 읽으며 느끼는 그것을 표현해 줄 문장들이었으니 결과적으로 그런 부분들이 책을 즐기는데 별 영향을 주진 않았던 것 같다.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제인에어 등도 초등학교 고학년때 처음 읽었다. 어린 눈으로 읽어내려간 그 시절에도, 저 작품들은 나에게 비슷한 느낌의 '정신적 영화 포스터'를 남겼었다. 키아라 나이틀리가 주연했던 오만과 편견 영화를 보면 한 톤 빠진 듯한, 비가 올듯한 그런 날씨의 느낌이 영화 전반에 녹아 있는데, 여작가들이 써 내려간 저 고전 로맨스들의 느낌이 나한테는 정확히 그런 느낌으로 남아있다.
시드니 쉘던을 처음 읽은건 중학교 때였다. 지금도 도대체 누가 그 소설을 들여와 방치해 놨는지 모르겠다. 밝은 겨자색의 그 책을 들고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지기 시작하는 섹스신에 몸둘바를 모르다가, 내용 자체에 흥미를 잃고 성인 영화를 훔쳐 보는 느낌으로 그 책에 무수히 등장하는 섹스신만 골라 읽고 야릇한 상상을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 두번인가 세번인가 그 책을 더 읽었고 물론 그때는 섹스신을 초월해 책에 등장하는 두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며 진행 할 수 있었다.
나 못지 않은 책벌레 친구네 놀러갔을 때, 우리집과는 달리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속에 정리된 책들 사이에서 그 책, '깊은 밤의 저편 (영제: The Other Side of Midnight')'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마도 저 책 우리집에도 있던데 라던가 하는 언급을 했던 것 같고, 그 친구가 읽어보았느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한 가지는 그 친구가 그때 저 책은 나쁘니 읽지 않는게 좋다라고 했던 거였다. 나쁜책이라. 물론 나는 그 친구가 무슨 이유로 그 소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몇년이 지나고 언제인지 여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선택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오래전일도 단편적으로 아주 뚜렷이 기억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엔 큰 줄기는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거의 기억을 못한다. 집에 나와서부터 그동안 계속해서 심해진걸 보면 그 무렵 기억들을 계속 환기시키는 가족들로부터 덜어지자마자 본능적으로 좋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들이 급격하게 멀어진 것 같다) 쉘던의 다른 소설 'Tell Me Your Dreams' 를 읽었다. 흔치 않은 소재에 특유의 솜씨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다중 인격 장애에 대해서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 알게된 언니랑 서점에 갔을 때 책들을 살펴보다가 그의 책을 다시 발견한다.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언니가 그랬다. 이 작가를 번역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삼류급으로 생각을 한다고. 말인즉, 다른 중요한 부분들은 평이하게 번역을 해 놓다가 갑자기 섹스신만 나오면 엄청나게 잘 묘사를 해 놓는다는 거다. 그때 키득대면서 강하게 동의를 했었다. 항상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쉘던의 작품은 섹스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 섹스신들이 주인공의 내면적 부분등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 그 전체적인 내용 자체가 사실 상당히 강렬하다. 괜히 베스트셀러 작가겠나. 그런데 한글번역본들이 나올 때 그 전달성이 섹스신에서만 발휘가 되었으니 책을 읽고 나면 남는건 그 장면들 뿐이고, 셀던=에로틱 소설 이런 이미지가 많이 박히지 않았나 싶다. 번역가가 남자였을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했었다.
몇년이 훌쩍 지난 후 다시 시작하는 영문판의 Tell Me Your Dreams. 문득 그와의 인연이 참으로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이 생각나 써 보았다. 지금 그의 이미지는 과연 좀 나아졌을지 궁금하다.


덧글
큐브 2009/11/02 11:35 # 답글
아 정말 속독이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안좋은 것 같아요. 저도 책을 빨리 읽어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는 건 잘하는데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캐치하긴 너무 어려워요. ㅠㅠ 어린이에게 좋은 독서지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속독을 익히되 정독도 잃지 않도록...Mannoya 2009/11/03 00:04 #
가끔 인상 깊었던 대사들을 기억해서 읊거나 짧은 시등을 낭독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문학작품을 읽을때는 완전 몰입해서 그 안에서 헤엄치다가 나오지만 , 이게 정말 머릿속 이미지로 기억을 하는거다 보니 저렇진 못하더라구요. 어렸을적 세계 전래동화같은 환상책들을 많이 읽어서 그렇게 된듯;;Semilla 2009/11/03 02:38 # 답글
시드니 쉘던은 안 읽어봤지만 저도 어렸을 때 섹스신만 골라보는 건 자주 했었지요....; '태백산맥'이던가, 조정래의 장편 소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었는데, 어느 섹스 신은 아예 누가 페이지를 찢어버려서 생략됐더라고요. 그 때는 많이 아쉬워했던....;;;이미지로 읽으면 문체에 구애받지 않게 되는 장점이 있군요! 저는 문체에 신경쓰는 타입이라 번역체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못 읽어요...
Mannoya 2009/11/04 02:55 #
이게 영상보다 내가 상상하는 거라 더 자극적이랄까요^^ㅋ 도서관 책은 다같이 즐겨야지 그런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군요.번역체도 외국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positive한 번역체가 있는가하면..좀 당황스러운 어체도 나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뜻만 전달되면 괜찮은 거 말고 문학작품은 정말 번역가가 해당 언어를 완전 잘 알면서 본인 스스로도 글 솜씨가 좋아야 하는 것 같아요...
sophia 2009/11/06 09:36 # 삭제 답글
저도 책 엄청 빨리 읽어요, 항상 전집이 집에 들어오면 며칠만에 읽어버리는 스타일이랄까 -_- 수능공부 할 땐 참 좋았지만 나중에 보니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저도 읽은 책 목록은 긴데 머리에 남는 목록은 별로 없다는 ㅠ